'감만본동'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11.05 부산 남구 감만동의 농업생활
  2. 2015.11.04 감만본동 마을 형성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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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감만동에는 80세대 정도 살았으며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였다. 30세대 정도가 농업을 하였고 어업은 모든 세대들이 종사하였다. 농사는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당시 농요의 노랫말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낭창낭창 벼랑 끝에/야속하다 울오래비

나도 죽어 후생가서/낭군부터 얻을란다.

다른 노랫말은 대연동 농소에서 불리던 농요와 비슷한데 위의 대목은 특이해서 그 내력을 보니 '어느 해 홍수가 났을 때 올케와 같이 떠내려가던 처자가 올케부터 구해주는 오빠를 보고 물에 떠내려가면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앞을 된창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는 농토가 많았다. 지금 보은정사 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많아 농사가 잘 되었다 한다.  1950년대 한국주철관이 들어오게 됨으로써 농토가 사라지고 택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1919년부터 1927년까지 동항초등학교 아래쪽에 있는 바다를(감만포) 매립하여 농토가 많이 생겼는데 해방 후 공장(한국주철관, 모나스공장, 한국수출포장, 태화보세창고 등)과 집들이 서서히 들어서면서 농토가 줄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도 산동네 부근, 양지골, 솔개고개 넘어 돌산가는 언덕배기에는 논농사를 또한 현재 감만시장통 부근은 밭농사가(, 참외, 배추 등계속 지어졌고 현재 119안전센타 일대도 전부 논밭이었다.

홍곡산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산동네 마을은 소나무로 둘러 싸여 주로 농사를 지었는데 마을 부근에 논들이 있고 큰 못이 있으며  그 아래쪽 논밭사이로 미꾸라지처럼 산물이 흘러 119안전센타를 거쳐 아래깻문 감만포로 흐른다. 이때만 해도 비온 뒤에 도랑에서 소쿠리로 미꾸라지를 잡는 풍경을 종종 보곤한다.

그리고 해방전 감만본동 동네공동방앗간으로 사용하던 연자방아가 있었는데 각자가 자신의 소를 끌고 와서 나락이나 보리 등을 찧었다고 한다. 해방 후 정미소가 들어서면서 필요 없게 되자 돌들을 깨어버려 지금은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봄철에는 모내기하는 모습, 가을철이 되면  도리깨로 타작하는 모습을 동네 곳곳에서 자주 보곤했다.

Posted by 금융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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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인조 임금 때 1635년부터 1652년까지 17년간 경상좌수영이 해운포(지금 수영)에서 이곳 감만포로 옮겨온 이후 청도가 고향인 금령김씨, 밀성박씨, 김해김씨 등이 현재 감만본동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경상좌수영에서 근무한 군인들과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홍곡산 아래 살기 좋은 이곳에 토착하여 양지골, 산동네, 된창지역에서 농업을 감만포, 모래구찌를 근거지로 해서 어업을 주업으로 생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이후 창녕 성씨, 남원 양씨, 인동 장씨 등이 함께 살았다. 이분들을 감만동토박이라 부르며 14대째 대를 이어오는 토박이가 있다. 또한 감만동토박이들은 왜구를 무찌른 최영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무민사라는 사당을 짓고 매년 향제를 지내고 있다.

감만동에는 조선시대 때 동래부가 중심지로 남촌면, 남하면, 석남면에 속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때 용주면, 부산부 서면, 부산진출장소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해방후에는 대연출장소, 부산진구 대연출장소로 1975년 남구로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1979년에 감만 1, 2동으로 분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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