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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이면 부산남구 감만동일대 모래구찌, 솔개바닷가에는 굿판이 곳곳에 벌어졌다.

동동동동맑은 북소리가 밤하늘을 타고 올리곤 한다.

오색색동옷을 입은 무당이 방울을 흔들며 춤추면서 바다에 빠진 자의 영혼을 달래기도 하고 용왕님께 풍어를 기원하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모래구찌방파제 끝에는 소원을 빌러나온 아낙네들이 켜 놓은 촛불 앞에서 손을 비비며 축원하면서 소지를 불살아 올리곤 하였다.

이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이나 호야불을 켰던 시대라 굿을 하고나서 두고 가는 양초는 동네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지금의 감만시장 근처에 초공장도 있었다.

그리고 해질 무렵이면 홍곡산 곳곳에서 빈 논밭 여기저기에서 동네사람들이 달을 보고 소원을 빌고 했으며 아이들은 줄을 빈 깡통에 불씨를 넣어 빙빙 돌리는 쥐불놀이, 볏단을 모아 태우는 달집태우기, 가마니에 불을 태워 끌고 다니는 놀이를 주로 하였다. 이때쯤이면 동직원이나 학교선생님들이 화재예방, 산불예방을 위해 단속반을 편성하여 홍곡산, 마을 여기저기를 다니며 지도활동을 하였다.

낮에는 족제비를 맨 사냥꾼을 앞장세운 마을풍물패가 고깔을 쓰고 꽹과리, 소고, , 징 등의 악기를 두드리며 줄을 지어 집집마다 돌면서 집안의 안녕을 빌어주고 쌀, 돈을 받아가곤 하였다. 그때는 동네아이들에겐 큰 볼거리로 풍물패를 졸졸 따라 다니며 구경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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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개마을 북쪽으로 감만, 용당 주민들이 이용하는 양지바른 공동묘지가 있고 그 한가운데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지금 부경대 용당캠퍼스 일대이다.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솔개에서 용당으로 가는 오솔길이 있었으며 공동묘지의 입구에는 상여를 비롯한 장사에 쓰이는 물건을 놓아두는 기와지붕으로 된 나즈막한 상여집이 있었다.

그 당시는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에 매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휘황찬란한 오색깃발을 바람에 날리며 딸랑딸랑 하는 종소리와 뒤를 잇는 상여꾼의 구슬픈 후렴소리, 망자의 가족들이 곡소리를 내며 가는 꽃상여 행렬은 당시에는 마을사람들에게 상당한 볼거리였다. 상여가 마을어귀를 벗어날 쯤이면 상여꾼들은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등 여러 핑계를 대며 상여를 내려놓고 가지 않았다. 그러면 유가족들은 음식상을 차려내고 상여에 쳐진 새끼줄에 돈을 꽂는 등 성의를 보여야 상여는 마을 어귀를 벗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이 근처가 동항초등학교 뒷산이라 소풍지로 이용되었다. 공동묘지 북쪽에는 계단식 논이 있었고 그 위쪽으로 옛 항공대학 건물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용당장 고개길이 있었다.

지금은 부경대학교 용당캠퍼스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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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라는 지명은 일제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며 일본말로 '아까사끼'로 불리었다.

일제시대에 감만동과 우암동 일대를 적기(赤崎), 적기반도라 불렀는데 1980년대까지 이 이름이 사용되었다.

198251일자로 적기1가는 문현4, 적기2,3,4가는 우암동, 적기5가는 감만동에 편입되었다.

일제시대에 감만동, 우암동 일대를 적기라고 부른 이유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홍곡산에는 그림과 같이 일제때 산에 나무가 없었는데 홍곡산이 황토산이어서 전체가 붉게 보여 사용했다는 설이 타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일제시대 1937년도까지 이 산의 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 모래구찌에 있었다고 하며 그 곳을 벽돌관이라 불렀고 황토흙이 좋아서 그때 당시 전국품평회에서 최고 품질의 벽돌로 평가받았다고 전해진다.

(적기 : 붉고 돌출했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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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감만동에는 80세대 정도 살았으며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였다. 30세대 정도가 농업을 하였고 어업은 모든 세대들이 종사하였다. 농사는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당시 농요의 노랫말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낭창낭창 벼랑 끝에/야속하다 울오래비

나도 죽어 후생가서/낭군부터 얻을란다.

다른 노랫말은 대연동 농소에서 불리던 농요와 비슷한데 위의 대목은 특이해서 그 내력을 보니 '어느 해 홍수가 났을 때 올케와 같이 떠내려가던 처자가 올케부터 구해주는 오빠를 보고 물에 떠내려가면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앞을 된창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는 농토가 많았다. 지금 보은정사 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많아 농사가 잘 되었다 한다.  1950년대 한국주철관이 들어오게 됨으로써 농토가 사라지고 택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1919년부터 1927년까지 동항초등학교 아래쪽에 있는 바다를(감만포) 매립하여 농토가 많이 생겼는데 해방 후 공장(한국주철관, 모나스공장, 한국수출포장, 태화보세창고 등)과 집들이 서서히 들어서면서 농토가 줄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도 산동네 부근, 양지골, 솔개고개 넘어 돌산가는 언덕배기에는 논농사를 또한 현재 감만시장통 부근은 밭농사가(, 참외, 배추 등계속 지어졌고 현재 119안전센타 일대도 전부 논밭이었다.

홍곡산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산동네 마을은 소나무로 둘러 싸여 주로 농사를 지었는데 마을 부근에 논들이 있고 큰 못이 있으며  그 아래쪽 논밭사이로 미꾸라지처럼 산물이 흘러 119안전센타를 거쳐 아래깻문 감만포로 흐른다. 이때만 해도 비온 뒤에 도랑에서 소쿠리로 미꾸라지를 잡는 풍경을 종종 보곤한다.

그리고 해방전 감만본동 동네공동방앗간으로 사용하던 연자방아가 있었는데 각자가 자신의 소를 끌고 와서 나락이나 보리 등을 찧었다고 한다. 해방 후 정미소가 들어서면서 필요 없게 되자 돌들을 깨어버려 지금은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봄철에는 모내기하는 모습, 가을철이 되면  도리깨로 타작하는 모습을 동네 곳곳에서 자주 보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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