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구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11.09 태성산 벽돌공장
  2. 2015.11.07 일제강점기 적기지명의 유래
  3. 2015.11.06 남구 감만동 예전의 어업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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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부산 남구 감만동은 벽돌공장으로 유명한

자역이었습니다.

붉은 색의 황토흙의 질이 좋아서 이 부근에 벽돌공장이 많았는데

전국의 벽돌중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홍곡산 솔개다리를 기점으로 유니언스틸쪽 도로를  둘러싼 능선을 타고 유니언스틸내 조그만 동산까지 이루어진 산을 태성산이라 하는데 지금 남은 흔적으로 유니언스틸 입구에 조그만 동산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모래구찌 넘어가는 고개 부근 현재 오륙도아파트 부지에는 지금은 없지만 당시 붉은 벽돌공장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부근을 벽돌관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당시 태성산의 붉은 색을 띤 황토의 질이 좋아서 벽돌용으로 전국 품평회에서 최고 품질로 평가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관공서는 대부분 붉은 벽돌로 건축하므로 벽돌의 수요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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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라는 지명은 일제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며 일본말로 '아까사끼'로 불리었다.

일제시대에 감만동과 우암동 일대를 적기(赤崎), 적기반도라 불렀는데 1980년대까지 이 이름이 사용되었다.

198251일자로 적기1가는 문현4, 적기2,3,4가는 우암동, 적기5가는 감만동에 편입되었다.

일제시대에 감만동, 우암동 일대를 적기라고 부른 이유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홍곡산에는 그림과 같이 일제때 산에 나무가 없었는데 홍곡산이 황토산이어서 전체가 붉게 보여 사용했다는 설이 타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일제시대 1937년도까지 이 산의 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 모래구찌에 있었다고 하며 그 곳을 벽돌관이라 불렀고 황토흙이 좋아서 그때 당시 전국품평회에서 최고 품질의 벽돌로 평가받았다고 전해진다.

(적기 : 붉고 돌출했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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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모래구찌]

감만동 지역의 사람들은 예전 1919년까지 지금 버스종점 아래부터 119안전센타 부근 지역은 바다로 되어있었다. 감만동은 감만포, 포리포, 모래구찌, 솔개바다로 둘러싸여 주로 어업에 종사하였으나 1927년 지금 버스종점아래 바다가 매립됨으로써 8.15 해방 이후로는 반농반어업의 생활을 하였다. 어업활동의 범위는 용당 신선대 앞에서 영도 아치섬까지의 연안이며 어업 방법은 어선에 2명의 어부가 타고 그물을 바다에 놓아 손으로 당겨서 고기를 잡는 방법인 수조망이었다. 어획물은 주로 광어와 도다리, 멸치 기타 잡어가 잡혔고 해조류는 미역, 곰피, 우뭇가사리가 채취되었다. 어획물은 주로 범일동 시장이나 주변 7곳 정도의 횟집에 판매하였다. 이때 아침에 동네마다 싱싱한 고기를 얹고 팔러 다니는 행상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감만동 어촌계는 1965년 조합원 42, 준조합원 20명으로 구성되었다. 포구(모래구찌)는 전체길이가 전 400m이며 모래사장의 폭이 20m정도였으며 모래사장 부근에 공동 작업실이 있었고 모래사장이나 방파제에서 출어준비를 위한 작업을 하곤하였다. 발파제와 모래사장, 선착장에는 0.8톤에서 2톤 규모의 범선(돛단배) 종류의 어선들이 30여 척이나 되었다.

감만동 어업의 쇠퇴는 관계기관에 매립허가를 얻은 성창기업, 연합철강, 극동정유, 동명목재 등의 바다매립과 공장건설로 어장이 상실되면서 어민들은 어업보상을 조금 받고 1985년 어촌계의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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