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박씨'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11.05 밀성박씨 감만문중 열녀 1
  2. 2015.11.04 감만본동 마을 형성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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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감만동 토박이 밀성박씨의 감만문중 열녀에 대해 포스팅 하겠습니다.

감만동토박이 밀성박씨 동은공 감만문중에는 조선시대에 세 분의 열녀(烈女)가 나왔는데, 한 분은 파평윤씨이고 다른 두분은  인동장씨와 영산신씨이다.

당시, 파평 윤씨의 열행에 대한 정문(旌門)건립 및 표창을 청원하는 상서문(上書文), 인동장씨에 대한 정문 건립 상소에 대한 예조의 답서(答書)가 전해오고 있으며  그 당시 감만리에는 임금이 하사한 정문이 건립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볼때 감만동은 삼강오륜을 실천하는 고장이었으며 본동마을에 서당이 있어 어릴 때 부터 유학을 가까이 하여 공부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정문(旌門)

효자 충신 열녀가 배출된 마을 입구 또는 본인의 집 앞에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받도록 하기 위해 세운 붉은 문으로 홍문(紅門) 또는 홍살문이라고도 한다.

그 일을 널리 알리고 표창하는 것을 정표(旌表) 그러한 일을 정려(旌閭)라고 했다.

Posted by 금융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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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인조 임금 때 1635년부터 1652년까지 17년간 경상좌수영이 해운포(지금 수영)에서 이곳 감만포로 옮겨온 이후 청도가 고향인 금령김씨, 밀성박씨, 김해김씨 등이 현재 감만본동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경상좌수영에서 근무한 군인들과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홍곡산 아래 살기 좋은 이곳에 토착하여 양지골, 산동네, 된창지역에서 농업을 감만포, 모래구찌를 근거지로 해서 어업을 주업으로 생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이후 창녕 성씨, 남원 양씨, 인동 장씨 등이 함께 살았다. 이분들을 감만동토박이라 부르며 14대째 대를 이어오는 토박이가 있다. 또한 감만동토박이들은 왜구를 무찌른 최영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무민사라는 사당을 짓고 매년 향제를 지내고 있다.

감만동에는 조선시대 때 동래부가 중심지로 남촌면, 남하면, 석남면에 속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때 용주면, 부산부 서면, 부산진출장소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해방후에는 대연출장소, 부산진구 대연출장소로 1975년 남구로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1979년에 감만 1, 2동으로 분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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