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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1.16 60년대 감만동 기업 1
  2. 2015.11.05 부산 남구 감만동의 농업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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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당시 감만동에는 농지가 많았으며 마을은 크게 본동, 모래구찌, 솔개, 산동네, 아래강변, 사택 등으로 나누어져 형성되었다. 그리고 지금과는 달리 산동네 말고는 주택들이 평지에 있었고 농지는 산동네 부근 땅, 버스종점 부근 땅, 지금의 감만시장 땅, 119안전센타 뒤쪽 땅, 한국주철관 아래쪽 땅, 모래구찌 입구쪽 땅, 솔개고개 뒤쪽 땅 등으로 넓은 편이었다.

그리고 감만동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육상, 해상, 철도교통이 발달되어 있어 공장입지 조건으로 좋은 편이었다.

60년대 기업형태를 갖춘 공장으로 사택에 대형수도관을 생산하는 한국주철관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었고 아래강변에 보세창고인 태화창고 옆에 부산파이프공장 그리고 돌산에서 생산되는 돌을 잘게 부수는 모나스공장이 있었다. 또한 그 위쪽에 포장지를 생산하는 한국수출포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인공조미료를 생산하는 아지노모도공장이 모래구찌와 솔개에 있었고 돌산쪽에 극동정유, 포리포에 철강회사인 연합철강이 생겼다.

소규모공장으로 본동에는 지금의 동항초등학교 교문아래쪽에 망치공장, 낚시공장, 철공소가 2군데, 방아간 그리고 지금의 감만시장쪽에 초공장이 있었다. 그리고 아래강변 바닷가(감만포)와 동담산쪽 땅은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군사지역으로 이용됨으로써 민간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Posted by 금융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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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감만동에는 80세대 정도 살았으며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였다. 30세대 정도가 농업을 하였고 어업은 모든 세대들이 종사하였다. 농사는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당시 농요의 노랫말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낭창낭창 벼랑 끝에/야속하다 울오래비

나도 죽어 후생가서/낭군부터 얻을란다.

다른 노랫말은 대연동 농소에서 불리던 농요와 비슷한데 위의 대목은 특이해서 그 내력을 보니 '어느 해 홍수가 났을 때 올케와 같이 떠내려가던 처자가 올케부터 구해주는 오빠를 보고 물에 떠내려가면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앞을 된창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는 농토가 많았다. 지금 보은정사 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많아 농사가 잘 되었다 한다.  1950년대 한국주철관이 들어오게 됨으로써 농토가 사라지고 택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1919년부터 1927년까지 동항초등학교 아래쪽에 있는 바다를(감만포) 매립하여 농토가 많이 생겼는데 해방 후 공장(한국주철관, 모나스공장, 한국수출포장, 태화보세창고 등)과 집들이 서서히 들어서면서 농토가 줄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도 산동네 부근, 양지골, 솔개고개 넘어 돌산가는 언덕배기에는 논농사를 또한 현재 감만시장통 부근은 밭농사가(, 참외, 배추 등계속 지어졌고 현재 119안전센타 일대도 전부 논밭이었다.

홍곡산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산동네 마을은 소나무로 둘러 싸여 주로 농사를 지었는데 마을 부근에 논들이 있고 큰 못이 있으며  그 아래쪽 논밭사이로 미꾸라지처럼 산물이 흘러 119안전센타를 거쳐 아래깻문 감만포로 흐른다. 이때만 해도 비온 뒤에 도랑에서 소쿠리로 미꾸라지를 잡는 풍경을 종종 보곤한다.

그리고 해방전 감만본동 동네공동방앗간으로 사용하던 연자방아가 있었는데 각자가 자신의 소를 끌고 와서 나락이나 보리 등을 찧었다고 한다. 해방 후 정미소가 들어서면서 필요 없게 되자 돌들을 깨어버려 지금은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봄철에는 모내기하는 모습, 가을철이 되면  도리깨로 타작하는 모습을 동네 곳곳에서 자주 보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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