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항초등학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11.14 50년대 감만동 교회
  2. 2015.11.05 부산 남구 감만동의 농업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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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감만동에는 기독교 교회가 2곳 있었다.

아래강변에 있는 감만교회는 1952년 감만동 85번지에 설립되었다. 지금의 쌍희반점(중국집) 근처에 있었고 교회입구는 골목길에 접해있고 앞에는 넓은 밭이 있었다. 이곳은 높은 종각이 있어 새벽 ,저녁의 기도시간이 되면 이 교회 종지기가 종에 달린 줄을 당기면 종소리가 딩동네를 울린다. 건물은 단층으로 천정이 높으며 이웃의 동항교회보다 시설이 좋았다고 생각된다.

초등학교시절 크리스마스가 되면 동네친구들은 모두모여 교회에 가곤 하였다. 신발을 잃어버릴까 고무신을 들고 마루바닥에 앉아 찬송가도 부르고 성경말씀도 듣고 하였으며 크리스마스 날 아기예수탄생에 대한 연극도 보고 선물도 받고 하였다.

또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당시에 야간통행이 금지된 시절이었는데도 신도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줄지어 다니곤 하였다. 감만교회는 1978년 감만동 134번지인 동담산 언덕으로 자리를 잡아 대규모 현대시설을 갖춘 교회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그리고 동항교회는 현재의 감만동 142번지에 위치하며 1955년 천막으로 설립하여 1956년 현재의 위치 뒷편에 작은 규모의 판자로 된 건물을 이곳 뒷편 언덕에 지어 운영하였다. 교회 뒤편 언덕으로 난 오솔길은 지금도 이용되고 있으며 이 길 따라 가면 길 언덕아래 당시 대나무밭이 있었고 교회 아래 평지는 넓은 논이 있었다. 당시 동항교회 종은 작은 종으로 감만교회 종보다 작았다. 이후 동항교회는 몇 차례의 시설 확장으로 현재의 위치에 대규모 현대시설을 갖춘 동항교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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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감만동에는 80세대 정도 살았으며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였다. 30세대 정도가 농업을 하였고 어업은 모든 세대들이 종사하였다. 농사는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당시 농요의 노랫말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낭창낭창 벼랑 끝에/야속하다 울오래비

나도 죽어 후생가서/낭군부터 얻을란다.

다른 노랫말은 대연동 농소에서 불리던 농요와 비슷한데 위의 대목은 특이해서 그 내력을 보니 '어느 해 홍수가 났을 때 올케와 같이 떠내려가던 처자가 올케부터 구해주는 오빠를 보고 물에 떠내려가면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앞을 된창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는 농토가 많았다. 지금 보은정사 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많아 농사가 잘 되었다 한다.  1950년대 한국주철관이 들어오게 됨으로써 농토가 사라지고 택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1919년부터 1927년까지 동항초등학교 아래쪽에 있는 바다를(감만포) 매립하여 농토가 많이 생겼는데 해방 후 공장(한국주철관, 모나스공장, 한국수출포장, 태화보세창고 등)과 집들이 서서히 들어서면서 농토가 줄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도 산동네 부근, 양지골, 솔개고개 넘어 돌산가는 언덕배기에는 논농사를 또한 현재 감만시장통 부근은 밭농사가(, 참외, 배추 등계속 지어졌고 현재 119안전센타 일대도 전부 논밭이었다.

홍곡산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산동네 마을은 소나무로 둘러 싸여 주로 농사를 지었는데 마을 부근에 논들이 있고 큰 못이 있으며  그 아래쪽 논밭사이로 미꾸라지처럼 산물이 흘러 119안전센타를 거쳐 아래깻문 감만포로 흐른다. 이때만 해도 비온 뒤에 도랑에서 소쿠리로 미꾸라지를 잡는 풍경을 종종 보곤한다.

그리고 해방전 감만본동 동네공동방앗간으로 사용하던 연자방아가 있었는데 각자가 자신의 소를 끌고 와서 나락이나 보리 등을 찧었다고 한다. 해방 후 정미소가 들어서면서 필요 없게 되자 돌들을 깨어버려 지금은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봄철에는 모내기하는 모습, 가을철이 되면  도리깨로 타작하는 모습을 동네 곳곳에서 자주 보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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